
가을은 참 묘한 계절이죠?
쓸쓸한 듯 따뜻하고, 고요한 듯 풍요롭지요. 누군가는 단풍 구경을 떠나고, 또 누군가는 붉게 물든 산을 오릅니다.
하지만 저는 언제부턴가 걷기를 좋아하게 됐습니다. 특히, 나무들이 길게 늘어선 메타세콰이아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 시간은 정말 뭔가 자연에서 에너지를 얻는 기분이랄까요? 그런느낌입니다.
이번 가을, 그 길을 다시 만나고 싶어 경상북도산림환경연구원으로 향했습니다.
이곳은 연구기관이자 생태의 보고(寶庫)로, 사계절 언제나 자연의 표정을 있는 그대로 담고 있는 곳이에요. 특히 가을의 숲은 조금 특별합니다. 한 줄로 가지런히 서 있는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며 잎을 흔드는 그 순간, 삶의 속도가 조금 느려져도 괜찮다는 위로를 건네는 듯했어요.
가을의 문턱에서 만난 계절의 색
입구에 들어서자, 부드럽게 내리쬐는 햇살이 은행잎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바닥을 노랗게 물들였습니다.
길 위를 덮은 낙엽은 마치 누군가 정성스럽게 깔아 둔 황금빛 양탄자 같았어요. 바스락소리가 발끝마다 피어났고, 그 소리 하나에도 가을의 결이 느껴졌습니다.
혼자 걷는 길은 조용했지만, 그 고요 속엔 수많은 소리가 숨어 있었어요. 새들이 나뭇가지 사이에서 바람을 따라 노래하고, 바람은 이따금 제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누구와 함께였다면 놓쳤을 순간들이었죠.
어떠한 것도 신경쓸 필요도 없고 오롯이 내 맘이 가는데로 천천히 걸을 수 있었습니다.
메타세콰이아길, 그 속을 걷다
숲길을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드디어 메타세콰이아길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오래전부터 이 길을 참 좋아했어요.
하늘을 찌를 듯 곧게 솟은 나무들이 양옆으로 늘어서 있고, 그 사이로 햇살이 떨어지며 긴 그림자를 만들어냅니다. 나무와 나무 사이로 바람이 드나들며 나뭇잎을 흔들 때면, 그 소리가 마치 오래된 친구의 인사처럼 들린달까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끝없이 뻗은 가지들이 하늘에서 맞닿아 있었어요. 그 모습이 어쩐지 사람의 인연 같았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결국엔 어딘가에서 이어지고, 서로의 하늘 아래 닿게 되는 그런 관계 말이에요.
길 위에는 단풍빛이 고루 떨어져 있었고, 햇살이 그 위로 쏟아져 작은 반짝임 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바람 한 줄기가 불어올 때마다 잎이 흩날리며 제 어깨에 가볍게 내려앉았어요.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계절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습니다.
산림문화관에서 만난 ‘시간’

길의 끝에는 ‘산림문화관’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나무 단면과 다양한 수종의 향을 체험할 수 있어요. 손끝으로 나무의 결을 따라 문질러보니, 그 안에 흐르는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이만큼 자라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계절이 흘렀을까요. 숲은 늘 제자리에서 묵묵히 시간을 견디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하루보다 훨씬 더 깊은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밖으로 나오자 다시 가을빛이 눈부셨습니다. 짙은 노랑, 붉은빛,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연초록이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했어요. 그 풍경 속을 천천히 걸으며 ‘나무는 늘 같은 자리에서, 그러나 매해 새로이 변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게 바로 자연의 힘이자, 삶의 법칙이 아닐까 싶어요.
나무 그늘 아래의 커피 한 잔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작은 카페가 나옵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 한 잔을 시켰어요.
잔을 손에 감싸 쥐고 창밖을 바라보는데, 메타세콰이아의 그림자가 천천히 흔들리며 제 얼굴을 스치고 있었습니다. 커피의 따뜻한 향기와 나무의 냄새가 섞여서, 마치 시간조차 잠시 멈춘 듯했어요.
‘이 순간을 기억해야겠다.’ 그 생각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포근해졌습니다.
노을빛이 덮인 숲

해가 기울 무렵, 숲은 금빛으로 변해갔습니다. 하늘은 분홍빛으로 물들고, 바람은 조금 더 차가워졌어요. 나무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길 위에서 저는 잠시 멈춰 섰습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와 함께 노을이 산허리를 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자 떠난 여행은 외로움을 배우는 게 아니라, 나 자신과 다시 만나는 일이다.’ 이 길을 걸으며 저는 수없이 제 마음의 그림자를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자 안에서, 오래 묵혀둔 따뜻한 마음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가을날, 메타세콰이아길을 걷다.
바람이 나를 스치고, 나는 그 속에서 다시 나를 만났다.”